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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1. 유관단체&부설기관
  2.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

성 프란치스코는 1181-82년 겨울, 부유한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많은 재산 덕분에 젊은 시절에 이미 부(富)와 쾌락과 명성(名聲)을 누렸으며, 동료들 사이에서 무절제한 선동자로 불려지기도 했었다.
18세 되던 해에 페루지아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기사의 꿈을 실현하려 했지만, 불행히도 그 전쟁은 아씨시의 패배로 끝나고, 그는 페루지아인들에게 잡혀 1여 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다.
1205년에서 1209년 사이,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그는 긴 회복기를 거치는 동안 깊은 영적 변화를 맞는다.
그리고 세속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스스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다미아노 성당에서의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음성과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복음 말씀을 따라 세속에서의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완전한 가난의 삶으로 귀의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열정은 하느님을 향한 노래의 몸짓으로 이어져 리보토르토에서 그를 포함한 열 두 형제들을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구두 인준을 통한 수도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뒤이은 그의 사도적 활동은 술탄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데 까지 뻗어갔다.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기를 열망하던 그는 죽기 2년 전인 1224년 9월 17일, 라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를 상징하는 오상(五傷)을 받았다. 그 날부터 세상과 모든 피조물은 프란치스코 안에서 더욱 새롭게 변화되었다.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하심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성인은 모든 자연 만물에게 자신들을 창조한 주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모든 자연을 형제 자매라고 불렀던 것이다.
1226년 10월 3일 저녁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와 형제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시편을 낭송했다 "소리 높여 당신께 부르짖을 때 이 호소를 들으소서...". 그리고 자매인 죽음을 맞이했다.

수도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 안에서도 널리 알려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 1209년에 시작 되었다.

'두 번째 그리스도'라 불릴 만큼 십자가의 신비와 그 의미를 삶으로써 드러낸 겸손과 가난의 성인의 영성이 워낙에 거대했기에 삶으로서 그의 영성을 그대로 살기에는 너무나 벅찼으며, 그래서 후에 독특한 세 개의 수도회로 분리되게 된다.

그러나 이 세 수도회의 근본영성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 정신과 그리스도 모방의 근본 영성은 동일하다. 그 중에 하나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Ordo Fratrum Minorum Conventualium-OFMConv.)는 1958년 한국에 진출했으며, 현재 서울, 부산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영성지도 및 사회복지 그리고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 꼰벤뚜알이라는 말은 공동, 집합이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를 뜻한다.
이 말은 수도회 초기부터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작은 형제회(OFM)'를 가리키는 말로 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