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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1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작성자 강명훈 아드리아노 작성일 2021-09-09 조회수 315
2021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그 차별이 더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성당도 백인이 다니는 성당, 흑인이 성당으로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흑인 아주머니가 시내 근교에 있는 결혼식장에 갔다가 근처의 성당에 들어가 주일미사에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당은 백인이 다니는 성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 신자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머니, 이곳은 백인들을 위한 전용 성당입니다. 빨리 나가주시기를 바랍니다.”

쫓겨난 이 흑인 아주머니는 너무나 서러웠습니다. 주님께서도 차별한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지요. 바로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나도 안 가는 그 성당에는 왜 가서 그런 꼴을 당하느냐? 앞으로 다시는 그런 성당에 가지 마라.”

차별하는 사랑이 있는 곳에 과연 하느님이 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차별을 하시겠다면 2,000년 전 그렇게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신 그분의 말씀은 “사랑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는 동안에도 당신을 중상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황금률이 크게 와 닿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루카 6,31)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복하려는 마음을 잠재우고, 이웃에게 자비를 어떻게 베풀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보복하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 사랑 없는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하겠다고 기도하시는 분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실 수 있는 마음일까요? 하느님께서 계실 수 없는 마음일까요?



삶의 의미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게 돕는 것이다(파블로 피카소).





판단은 그만.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며 간호했던 며느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남도 아니었는데도 다른 가족의 부탁과 권유로 시어머니를 모셨다고 합니다. 치매 환자인 어머니와 함께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남들에게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모셨습니다.

시간이 지나 갑자기 시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조금 더 최선을 다해 모시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형님 부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호했으면 훨씬 더 잘 모셨을 텐데….”

10년 넘게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가끔 와서 어머니와 대화 좀 나누다가 돌아간 것 외에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는데도 이런 말을 하니 너무 서운했습니다.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으로는 분쟁이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형님 부부의 말도 잘못이지만, 또 자신 역시 형님 부부에 대해 틀렸다고 생각한 것 역시 잘못입니다.

판단 자체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있을 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판단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이 판단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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