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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주보성인

  1. 성당소개
  2. 주보성인

성녀 글라라 (축일 : 8월11일)

세상을 비칠 빛이여!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Chiara di Favarone(1193/4~1253) 이탈리아 아씨시의 귀족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똘 라나(Ortolana)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글라라의 이름은 어머니가 기도 중에 온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데서 비롯되었다.
과연 그녀는 열심 한 기도와 착한 행실로 주위를 밝게 비추며, 늘 하느님의 은밀한 부르심에 귀 기울였다.

수도자의 길로!

이러한 글라라가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는데 성 프란치스코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마침내 1212년 3월 18일 성지주일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보속의 수도복'으로 착복되고 순명을 서약하였다.
아직 형제회에 여자 수도원이 없어서 근방의 베네딕도 수녀원에 머물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글라라를 집으로 데려가려하자, 그녀는 축성의 표시인 삭발한 머리를 보여 주며 자신의 뜻을 단호히 밝혀 부모의 애원을 뿌리쳤다.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

얼마 후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 뒤를 따르자 친지들은 아녜스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했으나, 글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에게서 동생을 보호할 수있었다.
이렇게 첫 자매를 얻은 성녀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받아, 친동생 아녜스를 비롯한 몇몇 자매들과 함께 성 글라라 수도회의 모태가 된 성다미아노 수도원의 봉쇄 안에서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공동체 생활로 '하느님의 구원 성업을 거드는 짝이며 성교회의 심장으로서 그 연약한 지체를 떠받치는 받침대'가 되는 프란치스칸적 관상의 삶을 시작하였다.

'산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

글라라는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자매들의 모든 기쁨과 아픔에 함께 하였고, 수도원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자매들의 비천한 여종이 되어 겸손하게 수하자매들을 섬겼다.
또한 그녀는 분별력있고 지혜로운 수도원장으로서 자매들의 의견에 늘 귀 기울이며 그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려 애썼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육화한 '가난한 동정녀'로 살았던 글라라에게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작은 형제들은 물론이요 교황과 추기경 및 왕과 귀족들까지 기도를 부탁하며 자문을 구하러 왔다.
프란치스칸 관상생활의 첫 터전이었던 아씨시 근교의 성 다미아노 수도원은 글라라가 수도가족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이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삶의 현장이었다.
아씨시에 사라센 대군이 쳐들어 왔을 당시 글라라는 자매들의 부축없이는 자신의 몸조차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지만 무방비 상태에 놓인 수도가족과 아씨시 시민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오로지 성체께 의탁하고 기도하여 이미 봉쇄구역안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복음의 약속에 대한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작은 빵 하나를 50여명의 수녀들이 먹기에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하였으며, 간절한 이웃 사랑에서 우러난 그녀의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가 완쾌되었다.
또 1252년 성탄밤, 중병으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아기예수를 경배하고 싶은 큰 열망으로,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 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성녀를 텔레비젼의 주보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42년간의 수도생활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면서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있었던 신비는 삶 자체로 드러나는 그녀의 기도에 있었다.

글라라에게 있어 기도는 존재 전부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함이었고, 수도원의 봉쇄는 주님과 단둘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었으며,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