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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1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작성자 강명훈 아드리아노 작성일 2021-11-09 조회수 229
2021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복음 요한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저는 신부가 되고 나서 수영을 배웠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배우는 수영이기에 쑥스러움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실력이 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차기를 해도 앞으로 가지 않고, 또 왜 이렇게 물을 많이 먹게 되는지…. 그럼에도 수영 강사에게 묻지 못했습니다.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저 열심히만 하면 잘할 줄 알았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새로 왔습니다. 저 못지않은 초보였습니다. 그런데 강사에게 계속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강사는 아주 친절하게 또 쉽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저와 몇몇은 강사가 여자 수강생만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요.

계속 강사에게 물어보던 이 자매님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만에 중급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중급반에 가서도 그곳 강사에게 계속해서 수영에 관해 물어보는 것입니다.

실력의 차이는 ‘혼자’와 ‘함께’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늘 주변과 소통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실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혼자서 높은 경지의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특히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세속을 내쫓는 성전정화의 행동과 유대인 지도층과의 논쟁을 볼 수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에 맞춰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니, 사람의 수만큼 동물이 성전 주위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동물시장처럼 북적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성전은 완전히 시장터로 변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제물용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환전상들 또한 들끓었습니다. 종교적인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 성전은 재건 중이었기에, 공사판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습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탁자를 엎어 버리는 폭력 행위를 하십니다. 이 모습이 유다인들과의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잘못된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또 자기의 편함을 위해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며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주님의 뜻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무는 인생에 의미를 더하는 일이다(엘리 위젤).





목적은 성격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자기 성격이 이렇게 되었다면서 과거 사건을 일으킨 대상에 대한 적의를 표현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사건의 트라우마로 좋은 성격을 세상에 보이지 못하고 그래서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격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것일까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자신의 성격으로 이런 업적을 세운 것일까요? 자신의 성격에 근거해 판단해서 결정했고, 이를 위해 노력해서 위대함을 드러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은 분명히 성격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확고한 목적 의식이 없다면 어떤 성취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성격으로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하며 성격 탓을 하기보다 나의 목적으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어렵고 힘든 일로 지금의 어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목적을 바라보면서 지금 어떻게 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미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를 향한 내 삶의 목적은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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