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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1년 11월 11일 투르의 성 마르키노 주교 기념일
작성자 강명훈 아드리아노 작성일 2021-11-11 조회수 244
2021년 11월 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복음 루카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행동 과학자 로건 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인연이란 ‘만드는 것’이지,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좋은 인연이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발견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무엇보다 나의 노력으로 좋은 인연이 만들어집니다. 결국 내 안에 좋은 인연이 이미 있습니다.

친한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인데 신부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초등학교 때에도 첫영성체를 같이 했던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같이 놀지도 않았고, 대화도 함께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좋은 인연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친구와는 지금도 자주 만나고, 전화도 자주 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소중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든 것입니다.

종종 좋은 인연이 찾아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남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모든 결정 사항이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이미 좋은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에 관한 관심이 최대 관심사였고 거의 민족적인 관심사였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호칭 밑에 다윗의 왕권이 꼭 재건되리라는 예언이 성경에 나와 있고, 또 그 약속을 그들이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왕국인 언제 재건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었습니다. 더욱이 외세의 침략을 받는 상태였기에 더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혜성처럼 나타나 외세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민족적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주님께서는 세속적으로 우렁찬 팡파르와 더불어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온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평상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동안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다가옵니다.

좋은 인연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우리 안에 이미 있었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한 나의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 각자의 노력도 정말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에 맞춰서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화를 찾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한 작 배려와 생각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들 거야(영화 ‘곰돌이 푸’ 중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의 균형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유다인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던 유다인과 전쟁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려운 상황에 대한 절망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뭐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더 큰 절망으로 이끌었던 것은 막연한 낙관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수용소에서 곧 풀려날 것이라고 턱없이 낙관한 사람들은 수용소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낙담도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 낙담은 사람을 시름시름 앓다가 생을 마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반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차분히 훗날을 대비했던 수용자들은 끝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자신의 균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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