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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1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작성자 강명훈 아드리아노 작성일 2021-11-20 조회수 271
2021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20,1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흉악 범죄자들이 종종 매스컴의 일면을 장식합니다. 그런데 이 범죄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쓴 글이나 그들이 하는 말에는 거의 ‘나’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라는 단어를 찾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우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 함께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사회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생각하고 바라볼 때 많은 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만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고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 점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제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 되는 길도 열립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자식을 낳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부활했을 때, 이 일곱 형제 중에서 누가 형수의 남편이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부부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런 곤란한 상황을 하느님께서는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당시 과부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동생이 보살펴야 한다는 규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사두가이파들은 편협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주장만 맞다는 생각을 가지면 닫혀 있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 집중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성장한다(쟈닌 갱동).





나이 듦

나이 듦을 확실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 멀리 건널목 신호등이 바뀐 것을 보고서도 힘들어 뛸 수 없을 때, 약병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의 처방전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의 주름이 낯설어 보일 때, 무엇보다 “신부님도 이제 늙었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렇다고 나이 듦이 싫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 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이 든 내가 젊었을 때의 나보다 분명히 성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자그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화도 잘 내지 않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기다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지난날보다 분명히 성숙해진 ‘나’이기에 지금이 좋습니다. 과격한 운동을 할 수 없어도 걸으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암기력이 예전만큼 좋지는 않아도 꾸준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쳤던 젊은 날이라면, 이제는 사랑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늘 좋은 순간만을 선물해주신 주님의 사랑에 오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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