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갈산동성당갈산동성당


컨텐츠

레지오게시판

  1. 공동체
  2. 레지오게시판
게시글보기
제목 2021년 11월 21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작성자 강명훈 아드리아노 작성일 2021-11-21 조회수 246
2021년 11월 21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복음 요한 18,33ㄴ-37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33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우리에게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은 의미를 찾기 힘들 때가 아닐까요? 특히 죽음의 순간에 자기 존재 이유를 잘 모를 때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서도 의미를 찾은 사람은 희망을 품고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죽음의 고통은 정말로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아프고 힘들 때, “아이고 죽겠네.”라고 자신도 모르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자기의 존재 이유조차 찾기 힘들면 더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죽음 직전 신부님께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정말 고마워요. 제가 하늘 나라에 가면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죽고 나서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편안한 모습으로 하늘 나라에 가셨다고 합니다.

존재 의미를 찾아서 늘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존재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즉,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이 아님을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 임금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며, 우리 모두의 왕이라고 하시는 분께서는 절대 자신의 기득권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봉사하셨고,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왕이 아닌 종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초라한 모습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힘’이라는 것을 통해서는 참된 영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의 몸 자체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남보다 윗자리에 올라가서 재력과 권력으로 사람을 짓누르는 세상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와 정반대로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랑과 희생으로 철저하게 봉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참 영광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우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주님의 기준을 바라보고 철저하게 따를 때,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통해 매 순간을 의미 있고 기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작은 일을 즐기세요. 언젠가 돌아왔을 때 그 일이 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로버트 브롤트).





꼰대? 열정?

어떤 자매님께서 무척 화가 났습니다. 성당에 가서 어느 빈자리에 앉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오시더니 “여기 내 자리야. 일어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자매님께서는 성당에 지정 좌석이 어디 있냐면서 화를 내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도 그 할머니가 꼰대질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알고 보니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스피커 바로 옆인 그 자리에만 앉는 거래. 신부님 말씀 잘 들으시려고 한다는데, 어디에서도 잘 들리는 우리가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신부님 말씀을 잘 들으려고 “여기 내 자리야. 일어나!”라고 무작정 말할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의 열정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정을 모를 때에는 ‘꼰대’로 보이지만, 사정을 알면 ‘열정’이 보입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2021년 11월 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전글
2021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수정 삭제 목록